석조문화재/陵墓 石人像

창녕 용연재 장간공 장일묘 석상

정태욱 2017. 1. 21. 18:32


























창녕 용연재 장간공 장일묘 석상

(昌寧 龍淵齋 章簡公 張鎰墓 石像)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용소길 93-44, 용연재

제작시기 : 조선시대


昌寧張氏始祖인 장간공 장일(章簡公 張鎰 1207-1276)은 자가 이지(弛之)고 처음 이름이 장민(張敏)이며, 창녕군(昌寧郡 : 경남 창녕군)의 군리(郡吏)였다. 성품이 온순 정직했으며 글을 잘 지었고 관리로서의 재능이 뛰어났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낙향해 15년을 지내다가 승평판관(昇平判官)이 되어 행정의 고과가 으뜸으로 보고되었다. 임기를 마친 후 다시 예전처럼 고향에 은둔해 일생을 마치려는 듯했으나, 안찰사(按察使) 왕해(王諧)의 천거로 직사관(直史館)이 되었고 거듭 승진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원종 초에 시랑(侍郞) 김지석(金祗錫)의 후임으로 전라도·충청도·경상도 등 삼도의 안찰사(按察使)가 되자 사람들은, 위엄과 명망은 김지석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결단하는 것은 그보다 낫다고들 말했다. 그 후 이부낭중(吏部郞中)으로 승진하고, 병부(兵部예부(禮部)의 시랑(侍郞)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했다.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전남 진도(珍島)에 웅거하자 조정에서는 장일이 남쪽 지방의 민심을 얻고 있다 하여 경상수로방호사(慶尙水路防護使)로 임명하고 그곳을 진무케 했다. 또한 장일은 여덟 차례나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왕명을 잘 이행했다. 판대부사(判大府事)를 지내다가 병으로 사직을 간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장일은 나라 일에 늘 힘썼으나 아직도 크게 등용할 여지가 있다.” 며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한림학사·찬성사로 위계를 넘어 임명했다. 유천우(兪千遇)가 이를 두고 축시를 지었다.

 

처음에는 유마(維摩)처럼 방장실(方丈室)에 있더니

마침내 균정(均正)처럼 장원랑(狀元郞)이 되었네.

 

이는 조균정이 늙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해 은사가 내리기를 바라다가 시험관이 그의 글이 우수한 것을 보고 장원으로 발탁했던 일을 인용해 우스개를 한 것이다. 원종 14(1273)에 전라도 지휘사(全羅道指揮使)로 나갔고 이듬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옮겼다.

충렬왕이 즉위하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보문서대학사(寶文署大學士수국사(修國史)로 올려 벼슬을 마치게 했다. 얼마 뒤에 죽으니 나이 일흔이었고 시호를 장간(章簡)이라 하였다.

[高麗史 卷 第106 烈傳 第19 張鎰 條 參照]


장간공 장일 묘의 석상은 조선 후기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서 인근의 유어면 내부곡 소재 동원 이승언(東園 李承彦, 조선 중기 문신) 묘의 석상과 대합면 대동리 소재 금헌 이장곤(琴軒 李長坤, 조선 중기 문신으로 이승언의 아들 ) 묘의 석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6호)과 같은 계열을 보여주는 석상으로 주목되며,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분묘석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