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고려판도판서은산부원군박공영균묘 문인석
창녕 고려판도판서은산부원군박공영균묘 문인석
(昌寧 高麗版圖判書銀山府院君朴公永均墓 文人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계성면 광계리 산82, 은산부원군 박영균 묘역
조성시기 : 조선 초기
고려 후기의 문신인 박영균(朴永均)은 송은(松隱) 박익(朴翊)의 아버지로 본관은 밀성이다. 그는 고려조에 익대공신 판도판서, 삼재상(三宰相)을 역임하였고 응천군(凝川君)으로 봉군되었으며, 뒤에 은산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고 묘는 계성면 광계리 을좌에 있으며, 배(配)는 정경부인 능주 구씨(綾州 具氏) 이다.
박영균은 1332년 7월 밀양시 부북면 삽포리에서 출생하였고, 고려 공민왕조에 등제(等儕)하여 한림문학사재소감(翰林文學司宰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郎) 등을 역임하면서 牧隱(이색), 圃銀(정몽주), 冶隱(길재), 陶隱(이숭인) 등과 도의지교(道義至交)하였다. 그리고 이성계 장군과 더불어 왜구와 호적(胡賊)을 정벌하는데 진국보충(盡忠保國) 하였지만, 고려왕조의 운수가 다하여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기미가 보이자 벼슬을 버리고 개성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뒤에 밀주 송계로 낙향하였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고려조를 잊지 못해 두문불출 자청하며 詩와 書로 交友들과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태조로 등극한 이성계는 박영균에게 예관으로 권근(權近, 1352-1409)을 보내 공조, 형조, 예조, 이조판서와 마지막에는 좌의정 벼슬로 다섯 차례 불렀지만 그는 맹오(盟汚)와 청명과니(聽命過泥) 등의 사유를 들면서 죽음을 각오한 채 왕명을 거절하였으며, 천무이일 신무이군(天無二日 臣無二君)이란 정충탁절(貞忠卓節)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부자이세(夫子離世)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뒤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