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문화재/石碑, 龜趺

창녕 최송설당 각자바위

정태욱 2018. 11. 15. 13:12












창녕 최송설당 각자바위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말흘리 5 (잣골 중턱)

    시대 : 1915(大正4)

 

조선왕조의 마지막 여류시인이자 육영사업가인 최송설당(1855-1939)의 흔적이 창녕 화왕산 자락의 자하곡에도 전해오는데, 도성암 아래편 계곡 옆 큰 바위에 崔松雪堂이라고 새겨진 刻字바위가 그것이다. 刻字바위를 창녕군민들은 '明成皇后 바위'라고들 부르기도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의 최송설당 각자바위는 국운이 약해 암울했던 시기에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이후 최송설당은 고종황제에게 전국 8대명산(백두산, 묘향산, 태백산,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 한라산, 화왕산)에서 명성황후의 진혼을 위로하는 제를 모셨으면 하는 주청을 드려, 고종황제의 밀명으로 제를 모셨던 곳 중의 한 곳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崔松雪堂(최송설당)’ 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글자는 가로×세로 60cm 정도의 크기로 새겨져 있으며, 일제강점기인 大正4(1915)에 이동로(李東魯)라는 사람이 새겼다는 명문이 남아있다.(大正 乙卯春李東魯)

 

최송설당은 본적은 전남 화순(和順)이며, 1855(철종 6) 829일 김산군 군내면 문산리(김천시 문당동)에서 지남거사(枳南居士) 최창환(崔昌煥)과 후취(後娶)정씨 사이에서 무남삼녀로 태어났다. 여사의 아버지 지남거사(枳南居士)는 서당훈장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어린 딸에게 한학과 한글을 가르치면서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은 누명을 벗기고 가문을 예와 같이 빛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는데, 6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이를 이해하고 스스로 맹세했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여사는 1882년에 종제(從弟) 광익(光翼)을 계자(系子)로 맞이하게 되며, 1886(고종 23) 아버지가 죽고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39세 때 불교에 귀의하여 정진하였다. 1894년경 서울로 상경하여 당대의 지식인 및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1897년에는 엄비(嚴妃)의 도움으로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의 보모가 되었으며, 귀비(貴妃)에 봉하여지고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영친왕의 보모로 덕수궁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송설당은 가문의 과제였던 선조의 신원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1901년에 고종은 화순 최씨의 몰적(沒籍)조치를 풀고 사면 복권 시켰다. 남존여비의 구습으로 호적에 이름조차 오르지 못한 최창환의 맏딸 송설당이 몰락한지 90년 만에 가문을 되살려낸 것이다.

 

이후부터는 불자로서 김천 청암사를 비롯하여 창원 성주사, 보은 법주사 복천암 등 여러 사찰의 佛事에 적극 참여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등 사회사업에 앞장서면서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과 애산(愛山) 이인(李仁, 1896-1979) 변호사 등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1931225일에 전 재산(302,100만원)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하고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가 그것이다. 건학이념은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이다.

 

여사는 詩文에도 능하여 259수의 漢詩50수의 國文詩歌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는 최송설당문집’ 3권이 있다. 문집이 발간된 1922년은 폐허’, ‘백조등 현대시 동인지들이 유행하던 시기였던 바, 최송설당이 남긴 한시와 가사는 전통 시가문학의 마지막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