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문화재/佛敎 石造文化財 資料

경남 창녕군 불교석조문화재

정태욱 2020. 2. 25. 11:41



경남 창녕군 불교석조문화재

 

♣♣♣ 佛像 ♣♣♣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龍船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95(지정일 1963,0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 용선대

    조성시기 :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 대좌 팔각중대석에 세 줄에 걸쳐 開元十.../月卄五...成內...” 음각으로 새겨진 명문이 있다. [開元 ; 唐 玄宗年號]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는 2009718일 서강대에서 열린 신라사학회 제85차 학술발표회에서 관룡사 용선대 석불좌상 명문을 통해 석조석가여래좌상이 통일신라 초기인 722-731년 사이에 조성된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昌寧 觀龍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519(지정일 1970.06.24)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옥천리)

    조성시기 : 고려시대

 

창녕 관룡사 목조삼방불좌상(昌寧 觀龍寺 木造三方佛坐像)

    보물 제1730(지정일 2011.12.23.)

    크기 : 석가불 높이 150cm, 무릎 폭 98cm

             약사불 높이 122cm, 무릎 폭 83cm

             아미타불 높이 124cm, 무릎 폭 80cm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 대웅전

    조성시기 : 조선 인조 7(1629)

 

목조석가여래삼불상은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불상이다. 본존불의 대좌 밑쪽에 묵서를 통해 숭정(崇禎) 2, 1629(인조 7) 기사(己巳) 10월에 불상조성을 시작해서 그 다음해(1630) 5월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에는 현진(玄眞), 승일(勝一), 천민(天敏), 수영(守英)8인이 참석하였는데 그중의 대표 격인 현진(玄眞)17세기 초에 경남 함양 상련대보살상, 전남 구례 천은사의 목조보살상, 충청남도 보은 법주사 소조아미타여래삼불상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이 상은 현진의 말년에 제작한 상이다.

 

창녕 관룡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6(지정일 2015.01.15)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 명부전

    조성시기 : 조선 효종 3(1652)

 

관룡사 명부전에는 주존불인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이 서 있으며 시왕상, 판관상, 귀왕상, 인왕상 2구 등 모두 17구가 서로 대칭을 이루며 봉안되어 있다. 이 가운데 무독귀왕과 제8평등대왕상에서 나온 복장기에 의하면 명부전 존상은 모두 효종3(1652)應惠, 戒贊, 密云, 印戒, 笁閑, 海機, 思敏 9명의 조각승에 의해 조성되어 관룡사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함께 수습된 후령통과 1638년 밀양 영정사에서 간행된 묘법연화경 권1등은 17세기 중반 불상에 납입된 복장유물로서 제작시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관룡사 명부전 지장시왕상과 권속은 긴 신체비례에 방형의 얼굴 그리고 간결한 옷주름 등이 특징이다. 이 지장시왕상과 권속일괄은 봉안처와 조성시기, 조각승이 명확하여 17세기 명부전 존상 연구에 좋은 자료로 주목된다.

 

창녕 관룡사 응진전 석조나한상 16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 응진전

    조성시기 : 근대

     

창녕 관룡사 응진전 석조아미타삼존불좌상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 응진전

    조성시기 : 근대

 

창녕 관룡사 석조보살좌상(昌寧 觀龍寺 石造菩薩坐像)

    비지정 문화재

    크기 : 상 높이 32cm, 무릎 폭 18.5cm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 대웅전

    조성시기 : 조선 말-근대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昌寧 松峴洞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75(지정일 1963.0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5-4 보호각

    조성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 무심사 석조여래좌상(昌寧 無心寺 石造如來坐像)

    비지정 문화재

    크기 : 불상높이 53.5cm, 불신 34cm, 어께 폭 15.5cm, 무릎 폭 27cm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 145, 무심사

    조성시기 : 고려시대

 

창녕 송곡리 석조여래좌상(昌寧 松谷里 石造如來坐像)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이방면 송곡리 산46

    조성시기 : 고려시대

 

창녕 석불사 석조여래입상 (昌寧 石佛寺 石造如來立像)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0(지정일 1983.07.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말흘리 산20-3, 석불사

    조성시기 : 고려시대

 

화왕산 중턱의 요바골이라 부르던 골짜기에는 천 년의 세월동안 찾아오는 중생들의 괴로움을 말없이 들으며 위안을 주었던 미륵부처님이 비바람을 맞으며 노천에 홀로 계셨다. 노천에 홀로 계신 미륵부처님의 큰 공덕에 감복한 불제자들이 이곳에 사찰을 세우고 법당에 모시면서 석불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석불사에 봉안된 석불은 1000년의 세월을 요바우골을 지키며 있었지만 사찰은 1930년경에 세워졌다. 그 전에는 사람들이 노천에 있는 석불을 찾아와 기도를 하였는데, 자식을 얻기 위해서 찾아오는 이들이 자식을 얻기 위해 이곳을 찾아 기도한 사람들은 모두가 아들을 얻게 되면서 득남기도도량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이 석불입상은 불신 뒤에 있는 광배에 아무런 무늬도 새기지 않아 소박함이 엿보이며, 조성 시기는 고려 초로 추정된다.

 

창녕 감리 마애여래입상 (昌寧 甘里 磨崖如來立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6(지정일 1972.02.12)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고암면 감리 산64

    조성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 관음사 석조미륵불비상 (昌寧 觀音寺 石造彌勒佛碑像)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1983.07.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도천면 영산도천로 11-14, 관음사

    조성시기 : 고려시대

 

영산 구계리 석조여래좌상 (靈山 九溪里 石造如來座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지정일 1972.02.12)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1264-4 보호각

    조성시기 : 고려시대

 

창녕 도성암 석조아미티여래좌상(昌寧 道成庵 石造阿彌陀如來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7(지정일 2005.10.13)

    크기 : 상 높이 56cm, 무릎 폭 39cm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자하곡길 147, 도성암 대웅전

    조성시기 : 조선 후기 (17세기 후반)

 

창녕 도성암 석조여래좌상은 지발과 육계의 경계 없이 완만하게 처리된 머리, 방형의 얼굴, 수평의 승각기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신체의 곡선과 양볼, 손발 등에 부분적으로 양감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석조라는 재질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조각기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창녕 청련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昌寧 靑蓮寺 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63(지정일 2008.01.1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계성화왕산로 288-102, 청련사

    조성시기 : 조선후기

 

이 불상의 정확한 조성 기록은 없으나 청련사가 1628년에 창건된 기록과 도광22(1842)에 대흥사에서 옮겨 왔다는 기록, 이 불상의 옷주름, 자세 등 각각의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17세기 말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매우 뛰어난 수작이다.

 

통도사 창녕포교당 목조석가여래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4(지정일 2002.08.14)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신당24-3, 통도사 창녕포교당

    조성시기 : 조선 영조 6(1730)

 

통도사 창녕 포교당 법당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석가여래좌상이다. 이 불상은 원래 창녕 관룡사에서 삼존상으로 조성 봉안했던 것을, 6·25전쟁 후 지금의 창녕 포교당으로 이 불상 1좌만을 옮겨왔다고 한다.

이 불상은 반가부좌한 좌상으로서, 곧은 상체에 머리를 약간 숙여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있다. 머리는 육계의 표현이 명확하지 않으며 정상계주와 중간계주를 표현하였고, 나발을 촘촘히 표현하였다. 얼굴은 방형이면서 턱선을 둥글게 처리하였는데 도드라지고 큰 백호, 가늘고 긴 눈, 완만한 콧등, 다문 입술, 양끝에 번진 미소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조화로우며 부드러운 인상을 풍긴다. 짧은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를 정면에만 얕게 나타내었다. 옷은 양어깨를 모두 덮은 두꺼운 대의(大衣)를 입었는데, 오른쪽을 어깨에서 팔꿈치 부위까지만 감아 내린 것이 특징적이다. 대의 내에는 양감 없는 가슴 아래로 수평의 군의(裙衣)가 보이는데, 옷주름선이 꽃잎형태를 띤다. 옷주름선은 어깨와 무릎 부위를 중심으로 간략히 표현되었고, 가부좌하여 드러난 오른발 밑으로 대의자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특히, 양 무릎 아래의 옷주름선을 꽃잎형태로 표현한 것이 이색적이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종아리 위에 가지런히 놓고 왼손은 제1지와 제3지를 맞대고서 오른발 위에 얹고 있다.

복장에서 발견된 불상조성기에 의하면, 조선 영조 6(1730)에 수화사 하천, 부화사 득찰·성찬·종혜 등이 참여하여 만들어졌으며 창녕 관룡사에 봉안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18세기 불상의 돋보이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필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된다.

 

창녕 삼성암 목조관음보살좌상 (昌寧 三聖庵 木造觀音菩薩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14(지정일 2004.10.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북암길 147, 삼성암

    조성시기 : 道光18(1838)

 

창녕 삼성암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안정감 있는 비례와 원만한 얼굴 표현에서 전체적으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특히 방형 얼굴과 중간이 갈라진 寶髻, 밋밋한 가슴과 승각기를 비롯한 법의 표현 등에서 조선후기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삼성암 법당 重建 上樑文(同治5, 1866)과 법당 창건주(宇洪比丘)의 법손이 후일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創建刻石(1881), 관음보살 개금불사 희사문(1966) 등 관련자료 등으로 미루어 보아 본 작품은 道光18(1838)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창녕 법화사 목조지장보살좌상(昌寧 法華寺 木造地藏菩薩坐像)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적지길 184, 법화사

    조성시기 : 조선후기

 

 

♣♣♣ 불상관련 석조부재(光背•臺座) ♣♣♣

 

창녕 사리 석조광배 (昌寧 舍里 石造光背)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6(지정일 1974.12.28)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계성면 사리 218-1, 보호각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이 광배는 신라시대의 사찰로 전하는 대흥사(大興寺)가 있던 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높이 1m, 너비 1.1m 크기로 중간 부분이 만곡(灣曲)된 배 모양(舟形)이며 頭光身光이 함께 표현되었다. 이 광배는 윗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나머지는 비교적 완전하며 새겨진 문양도 뚜렷하다. 광배의 중간에는 불상과 연결되어 있는 구멍이 남아 있다.

 

창녕 사리 불상대좌 연화대석(仰蓮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계성면 사리 218-1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 옥천사지 불상대좌 연화대석(伏蓮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219, 옥천사지

    제작시기 : 고려시대

 

창녕 남산호국공원 불상대좌 연화대석(仰蓮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434, 남산호국공원 비석군

               (9代 縣監 崔鐵崙 遺愛碑 碑座)

    제작시기 : 고려시대

 

 

♣♣♣ 석탑 ♣♣♣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昌寧 述亭里 東 三層石塔)

    국보 제34(지정일 1962.12.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시장237(술정리)

    조성시기 :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경)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 (昌寧 述亭里 西 三層石塔)

    보물 제520(지정일 1970.06.24.)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서탑길 4-7(술정리)

    조성시기 : 통일신라 후기

 

이 탑은 원래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국보 제34)과 같은 술정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위치가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같은 절터의 쌍탑이 아닌 별개의 탑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조성된 탑이지만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볼 때,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보다 다소 떨어지며 조성시기도 훨씬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영산 법화암 다층석탑 (靈山 法華庵 多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9(지정일 1972.02.12)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산36, 법화암

    조성시기 : 고려시대

 

법화암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다층석탑으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유행한 청석탑(靑石塔)의 형태를 띠고 있다. 본래 영취산 위 보림사 소속 암자에 있던 것을 현재의 법화암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전한다.

석재를 많이 잃어버렸지만 원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점판암이라는 특별한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창녕 퇴천 삼층석탑 (昌寧 兎川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지정일 1972.02.12)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1, 만옥정 공원

    조성시기 : 통일신라시대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창녕의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탑이 있던 마을 주변에서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 이름이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의 일부가 약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통일신라의 석탑 변천 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창녕 도천 삼층석탑 (昌寧 都泉 三層石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지정일 1983.07.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도천면 영산도천로 11-14, 관음사

    조성시기 : 고려시대

 

탑골이라 불리우던 보광사의 옛 터에 있었던 탑으로, 임진왜란 때 절이 폐허가 되어 탑만 서 있던 것을 1928년 현재의 관음사에 옮겨 세웠다고 전한다.

탑은 4면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둔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의 몸돌 1개와 지붕돌 3개를 차례대로 올린 모습이다. 비록 일부 석재가 없어졌지만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3단인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창녕 보림사지 삼층석탑 (昌寧 寶林寺址 三層石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6(지정일 1997.12.3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성내리 591-4

    조성시기 : 통일신라 후기

 

보림사에 있었던 3층 석탑으로, 절은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지고 탑만 빈터에 그대로 방치, 훼손되어 오던 것을 1915년 영산초등학교로 옮겼다가 1927년 학교를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면서 함께 옮겨 세웠다.

형태는 기단 위에 탑신의 1층 몸돌과 지붕돌 3개를 올리고 있는 상태로, 2·3층의 몸돌은 사라지고 없다.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탑을 다듬은 솜씨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 명도사 석탑재(昌寧 明道寺 石塔材)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고암면 유동길 16-48, 명도사

    조성시기 :

 

창녕 말흘리 석탑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신당길 21, 창녕여고 생활관

    조성시기 :

 

창녕 비봉리 석탑재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713, 비봉못 위쪽 야산

    조성시기 : 고려시대 (주차 : 비봉길 154)

 

창녕 옥천사지 석탑재(昌寧 玉泉寺址 石塔材)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219, 옥천사지

    조성시기 : 고려시대

 

창녕 인양사 석탑재(昌寧 仁陽寺 石塔材)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향교길 54, 창녕향교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 용흥사지 석탑재 (昌寧 龍興寺址 石塔材)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창녕박물관(야외)

               경남 창녕군 성산면 곽천대산로 94-9, 부용정

    조성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 영산천 출토 석탑재 (屋蓋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창녕박물관 야외

    조성시기 : 조선시대

 

창녕 훈련첨정 손공 묘역 석탑부재 (기단석)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군 고암면 억만리 988-3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추정)

 

 

♣♣♣ 부도(浮屠) ♣♣♣

 

창녕 관음사 부도 (昌寧 觀音寺 浮屠)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도천면 영산도천로 11-14, 관음사 경내

    조성시기 : 조선 후기

 

이 석종형 부도는 축산군지(鷲山郡誌)에 의하면 원래 부곡면 청암리 골짜기에 있던 것인데, 1920년 일본인 고가시게루(古賀繁)에 의해 반출되었던 것을 현재의 관음사로 옮겨온 것이다.

 

창녕 삼성암 마애부도 (昌寧 三聖庵 磨崖浮屠)

    명문 : 黃氏極樂舍利塔 丙申五月初九日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북암길 147, 삼성암

    조성시기 : 1836, 1896년 추정

 

      마애부도 좌우측편 각자

         黃氏極樂舍利塔

         丙申五月初九日

 

삼성암은 1838년 우흥스님이 중창하였으며, 보광전 목조관음보살좌상을 1838년에 모셨다고 한다.

마애부도 좌우측편에는 횡씨극락사리탑 병신오월초구일(黃氏極樂舍利塔 丙申五月初九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마애부도는 승려의 부도가 아닌 재가신도의 것으로서 병신년인 1776,1836, 1896년 중의 어느 해에 조성된 삼성암 불사와 관련이 깊은 불자의 것으로 보인다.

 

창녕 관룡사 마애부도 (昌寧 觀龍寺 磨崖浮屠)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용사 용선대

    조성시기 : 조선시대

 

창녕 관룡사 부도 (昌寧 觀龍寺 浮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지정일 1983.07.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0-2번지

    조성시기 : 고려시대

 

창녕 관룡사 월하당대사 조안탑(昌寧 觀龍寺 月河堂大師 祖安塔)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 경외

    조성시기 : 1741

 

창녕 관룡사 부도 4(昌寧 觀龍寺 浮屠 5)

     ♣부도(浮屠)-조선후기

     ♣부도(浮屠)-조선후기

     ♣부도(浮屠)-조선후기

     ♣부도(浮屠)-조선후기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 경외

 

창녕 보림사지 동부도 (昌寧 寶林寺址 東浮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27(지정일 1997.01.3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산86-1

    제작시기 : 고려 말 - 조선 초

 

보림사는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었으므로, 이 부도를 만든 시기는 고려 말·조선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도는 보림사 터에서 조금 떨어진 영축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낮은 받침돌 위로 배를 부풀린 듯 한 석종형이며,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을 한 작은 머리장식이 솟아 있다.

 

창녕 보림사지 서부도 (昌寧 寶林寺址 西浮屠)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659

    조성시기 : 조선시대

 

창녕 보림사지 부도 1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마을입구 보정사 갈림길)

    조성시기 : 조선시대


창녕 일미사지 사송당최백대사지탑 (昌寧 一味寺址 四松堂最栢大先師之塔)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계성면 사리 313

    조성시기 : 조선시대

 

창녕 사리 대흥사지 부도 5

     ♣부도(浮屠)-조선후기

     ♣부도(浮屠)-조선후기

     ♣부도(浮屠)-조선후기

     ♣부도(浮屠)-조선후기

     ♣부도(浮屠)-조선후기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계성면 계성화왕산로 288-102, 청련사 승탑원

 

창녕 안심사 왕연당강지대사탑(昌寧 安心寺 旺淵堂袶智大師塔)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성산면 큰담길 15-34, 안심사 입구

    제작시기 : 조선시대

 

왕연당강지대사탑의 원 소재지는 용흥사 절터이며, 근래에 안심사 입구로 옮겨온 것이다.

 

 

♣♣♣ 석등, 석등부재 ♣♣♣

 

창녕 관음사 석등 (昌寧 觀音寺 石燈) [답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1983.07.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도천면 영산도천로 11-14, 관음사 경내

    조성시기 : 통일신라 말 고려 초

 

이 석등은 임진왜란 때 폐사 된 송진리 소재 보광사(寶光寺)의 옛 터에 있던 것을 일본인 고가시게루(古駕繁)’가 가져갔다가 19285월 관음사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석등은 사각형태의 작은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이 있고 그 위에 불을 밝혀두는 사각의 화사석과 지붕돌을 얹었다. 흰색의 간주석을 제외한 각 부분이 푸른빛을 띠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의 석등으로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창녕 고암 원촌리 석등연화대석(下臺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고암면 원촌길 76-49, 원동서당 옆 보호수 아래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 인양사 석등 연화대석(昌寧 仁陽寺 石燈 蓮花臺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향교길 54, 창녕향교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향교 측(典敎)에 의하면 이곳에 있는 2개의 석등 연화대석들은 인근의 인양사 조성비가 서 있는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석탑 배레석과 석탑재 등과 함께 창녕향교의 재건과 복원공사 때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등연화대석(下臺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관룡사 용선대

    조성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 영산 교리 석등연화대석(下臺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유생길 5, 부자집보쌈(교리 90)

    제작시기 :

 

창녕 계성면 출토 석등옥개석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창녕박물관(야외)

    조성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 옥천사지 석등옥개석(昌寧 玉泉寺址 石燈屋蓋石)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219, 옥천시지

    조성시기 : 통일신라 말-고려 초

 

 

♣♣♣ 기타 불교석조문화재 ♣♣♣

 

창녕 관룡사 건륭 38년명 괘불대 (昌寧 觀龍寺 乾隆 38年銘 掛佛臺)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 경외

    조성시기 : 조선 영조 49(1773)

 

    • 명문내용 : 건륭삼십팔년계사십월일목청성조

                    (乾隆三十八年癸巳十月日木廳成造)

 

창녕 직교리 당간지주 (昌寧 直橋里 幢竿支柱)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지정일 1983.07.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직교리 64-11

    조성시기 : 고려시대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여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 불화를 그린 )이라는 깃발을 걸어두는데, 이 깃발을 다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양산 통도사 입구에 세워져 전하는 것처럼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는 예도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술정리 서 삼층석탑(보물 제520)이 있어, 이 일대에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절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마주보는 두 기둥의 안쪽 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두 개씩 있는데, 한쪽 기둥의 윗부분에 작은 기둥을 깎아 놓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창녕 일미사지 석조(昌寧 一味寺址 石槽)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창녕박물관

    조성시기 : 조선시대

 

창녕 인양사 배례석 2(昌寧 仁陽寺 拜禮石 2)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향교길 54, 창녕향교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창녕 관룡사 석장승 (昌寧 觀龍寺 石長丞)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6(지정일 1983.08.12)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조성시기 : 시대미상

 

관룡사로 가는 오솔길 양쪽에 서 있는 한 쌍의 돌장승이다. 사찰 입구에 두는 장승은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과 더불어 잡귀의 출입을 막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의 기운을 불어넣는 등의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표시·수문장의 역할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수호신이 되고 있다.

왼쪽에 있는 남장승은 높이 220둘레 70의 크기로, 상투를 얹은 듯한 둥근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다. 툭 튀어 나온 커다란 눈, 콧구멍이 뚫려있는 주먹코가 특이하며, 콧잔등에는 두 개의 주름을 새겨 놓았고,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송곳니 두개가 뻗어 나와 있다. 오른쪽의 여장승은 높이 250, 둘레 80, 사다리꼴 모양의 받침돌 위에 구멍을 파서 세웠다. 상투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남장승과는 달리 관모가 없다. 두 장승 모두 몸체에는 아무런 글귀가 없으며, 육중한 몸매로 인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언제 만들어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신앙물로 민간의 소박한 미의식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창녕읍사무소 소맷돌 1()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종로 38-9, 창녕읍사무소

    제작시기 : 조선시대

 

창녕 영산 남산호국공원 소맷돌()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434, 남산호국공원

    제작시기 : 조선시대

 

 

♣♣♣ 石碑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국보 제33(지정일 1962.12.20)

    소재지 : 경남 창녕군 교상리 28-1, 만옥정공원

    조성시기 : 신라 진흥왕 22(561)

 

원래 이 비는 창녕읍 말흘리 성황당 옆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소풍왔던 학생들이 발견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창녕공립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인 하시모토(橋本良臧)는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창녕의 고적을 조사하러 왔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에게 알려 신라비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191427일 학계에 보고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24년 만옥정공원 비각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비는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일정하지 않고 끝 행은 3자 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다. 후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씩 낮추어져 있다. 비문 전반부는 마손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후반부는 선명하여 판독이 가능하다. 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년시(신사년 2), 사적, 수가인물(수행원)3부분으로 되어있고 인물의 기록순서는 속부, 인명, 직관, 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며 글자간격은 4이다.

 

이 비는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창녕 인양사 조성비 (昌寧 仁陽寺 造成碑)

    보물 제227(지정일 1963.01.21)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294번지

    조성시기 : 통일신라시대

 

인양사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이 있는 여러 절의 범종, , 금당 등의 조성연대와 쓰인 식량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비로, 통일신라 혜공왕 7(771) 인양사 종을 만든 일로부터 이 비석을 세운 신라 헌덕왕 2(810)까지 40년간 이루어진 일의 내용이 담겨 있다.

비는 직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커다란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 뒷면에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사찰 조성에 관련된 당시의 승려를 기리기 위해 새겨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님은 애띤 얼굴에 자비로운 모습이며, 사람의 몸을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수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문에 새겨진 글씨의 형태는 당시에 유행했던 해서체의 범주를 벗어나 여러 가지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새로운 서체의 전개를 살필 수 있다.

 

창녕 최송설당 각자바위

    비지정 문화재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말흘리 5 (잣골 중턱)

    조성시기 : 1915(大正4)

 

조선왕조의 마지막 여류시인이자 육영사업가인 최송설당(1855-1939)의 흔적이 창녕 화왕산 자락의 자하곡에도 전해오는데, 도성암 아래편 계곡 옆 큰 바위에 崔松雪堂이라고 새겨진 刻字바위가 그것이다. 刻字바위를 창녕군민들은 明成皇后 바위라고들 부르기도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의 최송설당 각자바위는 국운이 약해 암울했던 시기에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참혹하게 살해된 이후 최송설당은 고종황제에게 전국 8대명산(백두산, 묘향산, 태백산,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 한라산, 화왕산)에서 명성황후의 진혼을 위로하는 제를 모셨으면 하는 주청을 드려, 고종황제의 밀명으로 제를 모셨던 곳 중의 한 곳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崔松雪堂(최송설당)’ 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글자는 가로×세로 60cm 정도의 크기로 새겨져 있으며, 일제강점기인 大正4(1915)에 이동로(李東魯)라는 사람이 새겼다는 명문이 남아있다.(大正 乙卯春李東魯)

 

최송설당은 본적은 전남 화순(和順)이며, 1855(철종 6) 829일 김산군 군내면 문산리(김천시 문당동)에서 지남거사(枳南居士) 최창환(崔昌煥)과 후취(後娶)정씨 사이에서 무남삼녀로 태어났다. 여사의 아버지 지남거사(枳南居士)는 서당훈장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어린 딸에게 한학과 한글을 가르치면서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은 누명을 벗기고 가문을 예와 같이 빛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는데, 6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이를 이해하고 스스로 맹세했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여사는 1882년에 종제(從弟) 광익(光翼)을 계자(系子)로 맞이하게 되며, 1886(고종 23) 아버지가 죽고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39세 때 불교에 귀의하여 정진하였다. 1894년경 서울로 상경하여 당대의 지식인 및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1897년에는 엄비(嚴妃)의 도움으로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의 보모가 되었으며, 귀비(貴妃)에 봉하여지고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영친왕의 보모로 덕수궁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송설당은 가문의 과제였던 선조의 신원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1901년에 고종은 화순 최씨의 몰적(沒籍)조치를 풀고 사면 복권 시켰다. 남존여비의 구습으로 호적에 이름조차 오르지 못한 최창환의 맏딸 송설당이 몰락한지 90년 만에 가문을 되살려낸 것이다.

 

이후부터는 불자로서 김천 청암사를 비롯하여 창원 성주사, 보은 법주사 복천암 등 여러 사찰의 佛事에 적극 참여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등 사회사업에 앞장서면서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과 애산(愛山) 이인(李仁, 1896-1979) 변호사 등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1931225일에 전 재산(302,100만원)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하고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가 그것이다. 건학이념은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이다.

 

여사는 詩文에도 능하여 259수의 漢詩50수의 國文詩歌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는 최송설당문집’ 3권이 있다. 문집이 발간된 1922년은 폐허’, ‘백조등 현대시 동인지들이 유행하던 시기였던 바, 최송설당이 남긴 한시와 가사는 전통 시가문학의 마지막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